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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기도 바이블 /캠벨 몰간

카이노스123 2022.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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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바이블

(The Practice of Prayer)

저자 : 캠벨 몰간

 

목차

1. 왜 기도 하는가?

  1장 기도가 어떻게 가능한가?

  2장 기도의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3장 기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2. 무엇을 기도 하는가?

  4장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아는가?

  5장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기도하는가?

 

3. 어떻게 기도 하는가?

  6장 기도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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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기도 하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계시하고, 우리 마음에 기도 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 넣으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일을 온전히 이루심으로써 인간을 기도 처소로 데려가는 중보 역사를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내주 하심으로써 우리가 바람직한 것들을 바라고 선택하여 기도하게 하셨다. 이렇게 아버지의 자비와, 중보의 아들의 공로와, 영감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의 기도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기도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에 관한 교리(히11:6)와, 그리스도의 선포(요15:7)와 성도들의 체험(행2:42)

 

기도의 객관적 가치에 대한 확신.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구함’이라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고귀하게 높이 들어 올리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확신 할 때, 사람들은 구하기를 계속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도의 주관적 가치에 대해 깨달은 모든 것, 기도가 자신의 성품과 품격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주목한 모든 것이 실상은 기도의 객관적 가치에 대한 깊은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기도 골방이라는 은밀한 곳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서 그 곳의 빛과 영광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나님과 종종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확실히 영향을 끼친다. 바로 여기에 기도의 주관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며 그들이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도의 주관적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기도의 객관적 가치를 입증하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도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증거들

*** 근거1 _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의 견실한 교리(히11:6)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어 우리가 아는 법칙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이루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또 다른 법칙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의 견실한 교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와 사랑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초자연적인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자연적인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이적은 우주의 모든 사실과 힘을 전혀 모르는 인간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의 발생이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을 깜짝 놀라게 한 그 모든 사건이 하나님께는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지식이 날로 증대되고 있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어둑어둑한 지식의 여명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거하시며 하나님께는 어둠이 없다고 단언한다. 인간의 눈에 자연 법칙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 전체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이 지금까지 발견한 것보다 더 높은 법칙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우주 한 가운데 좌정하고 계시다고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시며 영원을 통치하신다. 우주의 모든 법칙은 하나님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힘과 힘, 법칙과 법칙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게 할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께 구하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간이 알고 있는 법칙의 영역에서는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귀와 마음의 어루만짐을 얻고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대답을 발견할 때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 분이 만드신 우주보다 더 못한 존재로 좌천시키는 것이요, 하나님을 그 분이 창조한 것들의 한 복판에 갇힌 죄수로 강등시키는 것이다.

 

*** 근거2 _ 기도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요15:7)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매우 명료하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구하라”: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그것을 요구하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마음 내키는 대로’, “이루리라”: ‘발생하게 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기도가 명백한 ‘제한’(→’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안에 거하고 있는 ‘무제한의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의 기도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협력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은 인간의 욕구와 하나님의 뜻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것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능력을 동원해서라도 그 사람의 요청에 응답하실 것이다.

 

***근거3_ 성도들의 역사와 체험(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기도가 가능한 것이라는데 대한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역사와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수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이 구하여 받았고, 찾아서 찾았고, 문을 두드려서 그에 대한 응답으로 문이 열리는 것을 목도했다고 우리에 증언한다.

 

하나님께 이르는 확실한 길

인간은 과거에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다. 그것은 과거 인간들이 그런 원리를 이성적으로 이해했기 때문도 아니며, 현재 우리가 그것을 지성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중보의 오묘함을 통하여 기도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발견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이르는 확실한 길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인간은 이 길을 통해 지금까지 기도할 수 있었고, 구하여 받았고, 찾아서 찾았고, 문을 두드려서 그것이 열리는 것을 목도했다. 그러므로 기도의 객관적 가치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는 기도의 가능성 자체를 낳은 것으로 우리가 마땅히 숙고해야 할 그리스도의 은혜의 경륜( 經綸) 안에 모두 놓여 있다 할 것이다.

 

2장 기도의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리스도의 은혜(요1:18, 3:31-38)와, 하나님의 사랑(요10:11,17,18, 14:12-14)과 성령의 교통하심(요14:16,17,26, 15:26)에 대한 이해.

 

1. 요1:18, 요3:31-33 →주님이 ‘아버지를 계시하는 이’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음.

2. 요10:11,17,18, 요14:12-14 →’중보자’이신 주님이 우리를 아버지 앞으로 데려가 자신 안에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이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음.

3. 요14:16,17,26, 요15:26 →주님이 완벽하게 성취한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거하고 우리 속에 계시는 이로서 자신을 나타내셨음.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기도의 발판

위의 삼중의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기도의 발판을 구성한다.

그 발판의 첫째 국면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를 계시하심’으로서 우리 심령에 기도하고자 하는 의욕을 심어 주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에 관한 견실한 교리가 있기에 기도가 가능한 것임을 확인했고, 이 교리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얻은 것임을 알았다.

 

그 발판의 둘째 국면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권리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 면전으로 이끄는 역사를 이루셨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통하여서 기도가 가능하게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 이야말로 우리 심령에 기도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가르침이었음을 확인했다.

그 발판의 셋째 국면은, 자신의 사역의 성취 위에서 그리고 그 사역의 최고의 영광으로서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리스도 안에 서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거하심으로써 기도의 영감을 주신다. 그리고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의 증거와 체험들은 바로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영감의 결과였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우리가 깨달은 대로의 기도, 우리의 조상들이 체험한 대로의 기도,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대로의 기도는 이런 발판을 딛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첫째, 아버지에 관한 아들의 계시(요1:18, 요3:31-33)

1. 자연이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계시하지는 못한다.

2. 힘이나 지성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3. 하나님은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인격이다.→”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마음속에)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주의 이면에서 서로 결합하여 작용하는 힘과 지성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하나님은 힘의 이면에서 그것을 주관하는 ‘존재’이시요, 지성의 이면에서 그것을 이끄는 ‘존재’이시요, 사랑이시다. 이것을 진리로 받아들이자마자 내 마음에 기도하고자 하는 의욕이 샘솟는다. 힘이나 지성의 이면에 마음이 있다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힘이나 지성에 관여하지 않고, 그 마음을 향해 기도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이면에 계시는 마음이며 온전한 인격체이며 지적일 뿐만 아니라 의지적이고 감정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인간에게 계시하셨다.

 

4. 유한한 마음이 무한한 마음을 발견할 때 : 나의 유한한 마음이 하나님의 유한한 마음을 발견할 때, 나의 유한한 힘을 하나님의 무한한 힘에, 나의 유한한 정신을 하나님의 무한한 지성에 맡길 수 있다. 바로 이것, 즉 우주의 하나님이 품(bosom)과 마음을 갖고 계시며 그 품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 기도의 발판을 이루는 첫 번째 사실이다. 하나님에 관한 이 새로운 계시, 즉 하나님의 마음에 관한 계시,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계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계시가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해 인간에게 임했다. 인간 영혼에 기도를 향한 열정을 태동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관한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5. 감히 입을 열어 기도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할 때, 우리의 본성 안에서 하나님을 따라 나서고자 하는 의욕이 즉각 일어나는 동시에 우리는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죄의 참 의미를 깨닫고 침묵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한 의식을 상실하게 되고, 계시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계시의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죄를 그저 약점이나 결함 또는 발전을 위한 과정으로 여긴다. 오늘의 이 시대에 높은 지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을 고의로 무시하는 것이 고도로 발전한 지성의 표식이 될 수 없듯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궁극적인 지성에 반응하여 작용하는 영속적인 에너지만을 연상한다면 그는 자신의 약함이나 어리석음을 의식할 지 몰라도 자신의 죄는 결코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6.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각하게 되므로 :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성밖의 황폐한 골고다 언덕에 의식적으로 섰을 때, 그래서 십자가의 수욕과 고통의 비밀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을 때, 자신을 희생하시고, 부정하시는 마음을 보았을 때, 내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 그 사랑 안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고, 그 빛을 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티끌처럼 작아졌다. 나의 슬픈 마음은 기도하기를 갈망했지만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주님이 나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형언하기 어려운 사랑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죄가 지난 날의 우발적인 비행(非行)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자아 중심’이라는 나의 본질적인 태도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 빛 안에서 깨달았다. 그렇다. 내가 손을 입술에 대고 ‘나는 부정한 죄인입니다’라고 흐느낀 것은 예수님이 나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데려가셨을 때이다. 나는 기도하기 원했으나, 감히 입을 열어 기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랑을 향해 아무것도 구할 자격이 없는 죄인의 처지였다. 내가 그런 사랑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에 관한 계시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의 무엇을 내게 주셨다.

 

둘째, 예수님의 중보 사역(요10:11,17,18. 요14:12-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1,17,18) 

“내가 진실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행하리라”(요14:12-14)

 

이 말씀들의 광채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 자기 목숨을 버리신 분, 그리고 그런 행위의 비밀 속에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신 분,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목숨을 얻으신 분, 그런 행위의 능력으로 새 생명을 우리에게 맡겨 주신 분, 아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면전에 서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새 생명을 주신 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지 못하면, 우리의 죽은 영적 본성이 생명으로 소생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새로운 원동력의 필요성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망치고, 해롭게 하고, 우리의 삶에 달라붙어 있는 죄의 오염을 깨끗하게 씻어 주는 무엇인가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 우리의 감상적 기분이나 연민은 우리 자신의 양심에서 죄의 얼룩을 깨끗이 제거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라는 계시의 말씀에 반응하는 울부짖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시된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씻고 치유하는 비밀스러운 일, 시들어버린 우리 내면의 힘을 어루만져 소생시키는 새로운 원동력이 필요하다.

 

***그 분은 누구신가?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사63:1)

 

그 분은 누구신가? 상처 입은 손을 가지신 분, 그 얼굴에 고통의 비밀을 간직하신 분, 자색 옷에 감싸인 것처럼 희생적 증거들에 감싸여 있는 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선한 목자이신 분, 길 잃은 영혼들을 찾아 이 땅에 오신 분, 부상을 당한 채로 쓰러져 있는 영혼들을 발견 하신 분,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고, 놀라우신 능력으로 자기 목숨을 다시 얻으신 분, 자신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도록 우리에게 자신을 옮겨 주신 분,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으심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가진 인간에게 비전과 고결함과 승리를 주신 분이다.

그 분은 누구신가? 그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자신을 희생하여 인간을 구원하는 이 무한한 사랑의 비밀을 가지신 분, 시간과 감정과 육신의 한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렇게 우리는 아들의 찢어진 휘장을 통과하여 기도의 처소에 들어간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중보 사역의 비밀을 통해서이다.

 

셋째, 성령의 영감(요14:16,17,26, 요15:2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16,17,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해석해 주시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시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깨우쳐 주신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시며, 우리 마음에 새로운 갈망과 의욕을 불어 넣으신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의 기도가 나온다. 이렇게 우리가 아들이 계시하신 아버지의 빛 가운데 서서, 아들의 중보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영감에 반응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이런 기도의 발판을 확실히 알 때, 그래서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이고’, ‘누구를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고’, 누구에 의해 기도를 하는 것인지’ 정확히 깨달을 때, 우리의 기도는 놀라운 능력의 기도가 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시작하여, 무한한 샘인 하나님의 사랑을 거쳐, 마지막으로 영속적인 교제인 성령의 교통하심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축복했고, 이 기도에는 기도의 발판인 삼중의 사실이 다 들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가?”…”부요 하신 이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8:9), 이것은 ‘중보의 이야기’다.

“하나님의사랑”이란 무엇인가?...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계시하신 모든 말씀이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무엇인가…성령이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며 영감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3장 기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일상의 삶 전체를 기도로 바꾸기(눅12:32, 고전1:30, 롬8:22-28)

 

인간은 항상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깊은 비밀을 배운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으며,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신약 성경의 명령, 곧 “인간은 항상 기도해야 한다”(눅18:1)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준행할 것이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5:17)라는 사도의 명령을 지킬 것이다.

 

기도는 일상의 삶 자체로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준비’의 진정한 비밀을 배울 때, 우리의 삶 전체가 기도로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지 않고서는 기도의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 준비는 우리의 삶 자체와 관련된 준비,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준비이다. “우리는 기도를 가능하게 만드는 중대한 사실들에 일상의 삶으로 반응함으로써 기도를 위한 준비를 확고히 할 수 있다.”

 

진리는 우리에게 반응을 요구한다.

이것이 ‘기도를 위한 준비’의 포괄적인 원리 원칙이다. 우리는 모든 진리가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밝히는 빛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진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권리를 주장하고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진리에 꼭 붙잡혀야 하며, 또한 진리는 어떤 인생에게 자신을 나타내자마자 그 인생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진리는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 그것을 붙잡을 때, 그의 의지에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럴 때, 그가 그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성화(聖化)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된다.

 

‘기도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진리와 일치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우리의 일상의 삶 자체로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대로 사느냐에 따라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할 뿐 아니라 기도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이다.

 

기도의 발판을 구성하는 진리에 대한 정밀 탐사

-첫째, 아버지가 계시한 세가지 상징(눅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 하시느니라”(눅12:32)→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목자로서, 아버지로서, 왕으로써 계시된다.

 

***반응1- 하나님이 목자 이시라는 계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목자 개념을 생각할 때, 마음속에 온화함과 다정함을 느끼고, 목자가 공급하시는 것 안에서 편히 쉬고 만족하면서, 목자가 나를 이끌고 계시므로 기쁨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 때 기도할 수 있다.

***반응2_ 하나님이 왕 이시라는 계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의 잦은 기도가 능력의 기도가 되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주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계속 기도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왕이신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고, 우리의 사업이나 대인 관계나 오락이나 삶 전반에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무엇인가가 들어 오도록 쉽게 허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면서도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에서 세력을 떨치게 허락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엄숙하고도 두려운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계시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의 숱한 기도가 능력의 기도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반응3_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계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가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 이는 왕으로서의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나 목자로서의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에 만족하게 하는 것을 무한히 능가하는 것이다. 자식은 아버지의 본성을 물려 받는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본성을 물려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켜,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기도 능력이 결정된다. 오직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 영감을 줄 때, 우리는 기도를 원하게 될 것이고, 또 우리의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로 바뀐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반적인 태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관한 세 가지 진리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지혜”이시며 하나님의 이 지혜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속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 이 세 단어가 그리스도의 전체사역을 포괄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제(時制)를 나타낸다. “의로움”은 구원의 과거 시제를 나타내며, 우리가 회상하는 체험이다. 과거에 우리가 믿을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셨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구원이었다. “거룩함”은 구원의 현재 시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자신의 ‘거룩함’을 나누어 주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구원이다. “구원함”(영화로움)은 구원의 미래시제이다. 우리가 믿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는 삶이 구원의 미래시제이다. 그리스도께서 장차 자신의 ‘영화로움’을 우리에게 입히실 것이고, 그것은 우리 육신의 구원이 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우리의 것이 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화로움’이 장차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반응1-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시켜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얼마나 굴복시키느냐에 따라 우리는 기도를 위한 준비를 갖출 수 있다. 기도의 원동력은 ‘성결함’이다. 성결함은 성품의 곧음이며, 의로움은 행위의 곧음이다. 행위의 곧음은 오로지 성품의 곧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귀속시킬 때, 우리는 성품의 곧음을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을 받은 것이다.

 

***반응2- 그리스도의 거룩함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거룩함’은 그리스도께서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책임은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전해주시는 이 거룩함의 은혜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는데 전적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닮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의무나 희생이나, 계획을 요구하실 때, 우리는 그것에 기꺼이 동의하며 순종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반응3- 그리스도의 영화로움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제임스 데니(James Denney)박사는 신약성경 데살로니가 전후서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대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꽃이다. 그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중대한 것을 결하게 된다. 앞쪽과 위쪽을 바라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온전함의 한가지 표시를 결하게 된다. 지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떠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요즈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중단해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틀림없는 이 진리를 지금 당장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발산할 수 있는 유일한 빛은 하나님의 ‘내일’을 기대하며 위(하늘)를 향한 얼굴에서 광선처럼 뿜어져 나오는 빛뿐이다. 하나님 나라를 여기 이 땅에 건설하는 일에 피를 쏟으며 희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바로 다가오는 영광을 주시하는 사람이다. 진정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면 우리 주변의 슬퍼하는 사람들을 응시하면서 왕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근면하게 일하는 한편, 다가오는 영광의 빛을 향해 얼굴을 들어 올리고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소망의 능력 안에서 살아야 한다.

 

-성령의 영감에 관한 진리 (롬8:22-28)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2-28)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주신다. 성령님의 해석은 우리 마음에 의식을 낳고 그 의식은 다시 갈망을 낳는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간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과 인생의 모든 사실에 대해 골똘히 생각할 때,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과의 관계 속에서 잘 정돈해 주신다.

 

성령님처럼 탄식하라!

우리는 실패한 세상가운데 살고 있다는 의식이 우리가운데 생겨난다. 하나님 없는 모든 인생은 한계와 무기력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새로운 의식이 우리 안에 생길 때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 진정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은 땅의 슬픔을 가장 쓰라리게 느끼는 사람이며, 길 잃은 영혼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데려오기 위해 간절한 간구가운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불만족을 우리에게 심으신 뒤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바라고 하나님의 뜻을 확고히 세우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 일으키신다. 이것은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인생을 결박하고 있는 사슬을 끊는 것이다.

 

성령님의 음성에 반응하라!

우리는 하나님 없는 인생의 탄식을 듣고 함께 탄식하며, 하나님 없는 인생의 고통을 알고 함께 아파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이런 새로운 ‘인간성’으로 세상의 고뇌를 깊이 공감하며 세상의 고통을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세상의 슬픔을 알기 원하신다. 그래서 성령님은 세상의 탄식과 고뇌를 우리에게 해석해 주는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느낄 때, 우리 삶에서 새로운 갈망이 솟아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 자신을 독려하여 하나님 나라가 속히 임하게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그런 기도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위선이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희생해야 한다. 우리의 이러한 기도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수고와 산고가 나올 것이다.

 

 

2. 무엇을 기도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를 따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또한 주님은 기도의 가장 중대한 목적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들을 받으시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뜨거운 열정, 이것이 바로 기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아는가?

-주기도문을 통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 알기(마6:9,10)

‘우리는 어떤 주제들에 대해 기도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이 주제들은 주님의 메시아선언(산상수훈)에 담긴 주기도문에 명확히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선언.

예수님이 열 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예수님의 메시아 선언은 왕이신 그 분을 거역하는 사람은 아무도 받아 들이거나 따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관한 선언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현세가 지속되는 동안 예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원칙들을 실현하고, 세상에서 그것들을 나타내는 교회 안에서 이 기도가 합당한 자리를 가진다는 것을 명백히 깨달을 것이다.

 

‘주기도문’은 그 자체로서 매우 포괄적이며,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것들을 총 망라한다. 왕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기도의 들판에 흩어져 있던 모든 본질적인 간구들을 서로 짜고 엮어, 기도의 들판 구석 구석을 포괄함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에게 언제나 항상 드릴 수 있는 기도의 주제를 계시하는 하나의 완벽한 ‘전체’를 만드셨다. 그래서 우리가 이 기도를 ‘기도의 모범(Pattern Prayer)’이라 칭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문장 배열(영문 개역 성경의 주기도문을 그대로 인용하여 형태만 시각적으로 배열한 뒤에 직역한 것)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s)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Thy name be hallowed)

나라가 임하옵시며 (Thy Kingdom come), 뜻이 이루어 지이다(Thy will be done)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as in heaven and on earth)………주기도문 전반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그리고(and)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Forgive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s). 그리고(And)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주기도문 후반부

 

올바른 순서대로 기도하는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것은 예수님이 정하신 우리 삶의 순서인 동시에 기도의 순서이기도 하다. 우리의 기도가 주기도문의 구조 자체가 명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관심사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필요를 추구할 때에만 주님이 정하신 이상(理想)과 부합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전반부를 구성하는 세 가지 간구와 그에 대한 집중연구.

주기도문의 전반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원하신 관심과 관련.

(‘하늘’→첫째, ‘대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됨. “공중의 새를 보라”:마6:26 Behold the birds of heaven, 둘째, ‘우주’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됨.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욜2;30 I will show wonders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세번째, 또 ‘다른 계’, 인간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 거주하는 장소,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명백히 나타나는 장소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됨.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셋째 하늘(The third heaven)에 끌려간 자라”:고후12:2.)

 

(1)’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서 하늘의 의미(복수형 heavens 으로 언급)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하늘’의 세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진다고 믿는다. 이 말씀은 곧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언급된 세 하늘 모두의 안에 계시다는 뜻이다.

우리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따라 기도할 때 기도의 첫마디에서 하나님에 관한 교리, 즉 하나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만큼 하잘할 것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의 주목을 받지 못할 만큼 작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을 주는 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2)’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에서 하늘의 의미(단수형 heaven으로 언급)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곳’, ‘하나님의 뜻이 영원한 법이 되는 곳’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의미는 셋째 하늘의 질서가 이 땅에서도 확립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3) 셋째 하늘의 질서가 이 땅에 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사랑(요일4:16)과 빛(요일1:5)과 생명(요일5:11,12참조)의 질서

‘사랑’, ‘빛’, ‘생명’, 이 세 단어들은 단순하고 간결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고한 질서를 완벽히 묘사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움직이는 더할 나위 없는 ‘추진력’이며, ‘빛’은 그곳의 모든 성도를 덮는 완벽한 ‘지혜’이며, ‘생명’은 그곳의 모든 거주자로 하여금 사랑의 자극에 반응하여 빛 가운데로 걷게 하는 ‘힘’이다. 사랑은 추진력이며, 빛은 지혜이며, 생명은 에너지이다.

 

이렇게 볼 때, 셋째 하늘의 질서와 이 땅의 질서가 뚜렷이 대비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사랑’이 현대인의 행위의 궁극적인 동기가 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실 당시의 사람들도 그랬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 역시 완전한 빛이 발걸음을 비추어 줄 때에도 빛 가운데서 걷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빛보다 더 어두움을 좋아하고 그 소행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세상 모든 사람이 사랑과 빛으로 나와 그 가운데서 걷도록 기도하라!”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고결하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라도 그것을 행하기에 충분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셋째 하늘에는 사랑이 헌신과 예배의 동기가 된다. 사랑의 영감으로 모든 것을 주고 받게 된다. 스랍들의 날개의 모든 움직임과 찬양의 모든 음조가 사랑의 추진을 받는다. 천국에서는 사랑이 성도들의 행동을 자극하는 동시에 빛이 그들의 발걸음을 조명하므로 무지와 실수라는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성도들은 사랑의 반응에 자극하여 완전한 빛 가운데서 주님을 섬긴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력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결코 피곤해하거나 권태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런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을 때, 그래서 ‘사랑’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행동의 궁극적인 동기가 되고, ‘빛’이 그들의 완전한 지혜가 되고, ‘생명’이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한 충분한 능력이 될 때, 과연 그것이 세상에 무엇을 의미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주기도문의 타당성

과연 ‘셋째 하늘의 질서를 이 땅에 확립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신다고 확신한다.

 

(1) 사랑의 추진력으로 움직이신 예수님 ;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들 가운데 오셨을 때 천국의 질서가 이 땅에 명백히 나타났으며,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애는 어느 곳, 어느 상황에 계시든지 예수님의 모든 행위와 말씀과 예수님이 존재하시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사랑’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사랑의 추진력에 따라 움직이셨다.

 

(2) 지혜의 빛 안에서 걸으신 예수님: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을 때 우리는 모든 것에 완벽히 정통한 지혜의 빛이 예수님의 생애 전반에 명백히 나타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언제나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셨다. 그 길이 빛의 조명을 받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자극에 반응하여 자기 앞에 있는 길을 보셨고, 그 길로 곧장 가셨다.

 

(3)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신 예수님 :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이 계명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7,18).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이 놀라운 말씀을 이루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일어나셨다. 세상은 보아도 깨닫지 못했지만, 천국의 질서가 ‘한 인간’안에서 인간의 역사에 나타났던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자극에 반응하여 빛 가운데 걸으셨으며,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고 다시 살아 나셨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의지하고 따르는 모든 인간을 위해 죽음의 세력밖에 있는 대로 위를 달리셨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이 ‘계시자’를 어떻게 대접했는가? 그 이야기는 결국 세상의 궁극적인 비극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세상이 증오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죽였고, 어둠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껐으며,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4) 주기도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십자가 :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박아 죽였으나”(행2:23).

 

십자가는 주기도문에 대한 세상의 응답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하다. 이 땅에 계시된 천국의 질서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이는 것’이었다. 반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비밀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그리스도를 내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 인간들이 저지르는 살인 행위의 맞은 편에서 효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간의 거부를 표시하는 십자가 바로 그것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견고한 수단이 된다.

 

우리에게 주기도문으로 구하라고 명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 그 원칙들을 구현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 안에서 ‘빛’ 가운데 걷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기도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이름과 공로와 능력 안에서 이 기도에 대한 궁극적인 응답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이 기도의 모범이 세상 전체를 우리의 기도 제목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과.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있다는 것과 세상의 구원이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기도하는가?

-주기도문을 통한 인간의 구체적인 필요 알기(마6:11-13)

주기도문의 후반전 세 간구는 인간의 순례, 즉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과 관련된다. 예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에 관한 삼중의 사실에서 보듯이 우리는 하나님은 왕이시며, 아버지시며, 목자이시라는 점과 인간이 이런 순서에 따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왕권에 굴복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깨닫고, 하나님께서 그 뜻으로 정해주신 길을 걷기 시작할 때 목자이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체험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주기도문의 후반부는 백성의 외침이요, 자녀들의 외침이요, 양떼의 특권과 크신 목자의 돌보심을 구하는 양떼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

 

세 세상과 세 간구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위쪽에 있는 세상’과 우리 ‘주변에 있는 세상’과 ‘아래쪽에 있는 악의 세상’과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주기도문의 후반부는 그 ‘세 세상’가운데 하나님의 영역을 특별히 강조한다. 첫째 간구는, 생명으로서의 하나님께 생명의 유지를 구하는 외침이라 하겠고, 둘째 간구는, 빛으로서 하나님의 곧음을 구하는 외침이라 하겠고, 셋째 간구는, 사랑으로서의 하나님께 승리를 구하는 외침이라 하겠다.

 

기도의 시금석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생명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자 할 때, 그는 참된 생명이 오직 하나님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과, 또한 행실의 곧음을 구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빛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아래쪽에 있는 세상으로부터의 구조와 건짐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을 악에서 건져주실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온유한 사랑을 깊이 인식하며 간구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기도는 ‘무한한 진리, 영원한 가치와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하는 기준에 따라 검증을 받는다.

 

첫째, 생명이신 하나님께 생명의 유지를 구하는 간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 간구의 핵심은 생명이신 하나님께 생명 유지를 구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나타낸다.

 

(1)주님이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의 의미 : 이 ‘양식’이라는 단어는 육신의 삶과 영의 삶 전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실 때, 그리스도안의 온전한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마4:4, 요6:35). 그러므로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이 첫째 간구는 아버지께 우리의 온전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달라고 구하는 기도이다.

 

(2)’일용할 양식’의 간구와 관련하여 범하는 두 가지 오류.

*오류1_ 육신의 양식만 구할 뿐 영적 양식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우리 기도에 기적적으로 응답하는 대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수고’를 통해) 우리 육신에 필요한 것들을 얻는데 필요한 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으로써 응답하신다. 또한 영적인 양식을 구하는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의 양식을 구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얻기 위해 근면히 수고하고,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 “생명의 떡”(요6:35)을 먹을 때에만 유지된다.

 

*오류2_ 매일 대하는 밥상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 많은 매개자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만, 우리의 육신과 영혼에 충분한 양식을 공급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3)주기도문의 사회적 성격 :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우리에게’, ‘우리를’, ‘우리들’과 관련된 기도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랑 가운데 다른 사람의 필요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4) 마귀의 공격 대상 :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영적인 양식을 먹지 않아 굶주린 날에 마귀의 유혹에 맞서려고 하다가 원수의 공격을 당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배불리 받아 먹은 사람은 악의 유혹에 가장 강하게 맞서는 사람이 될 것이고, 마귀가 아무리 거세게 공격하더라도 능히 승리할 것이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간구

주기도문의 후반부 두 번째 간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1)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값없이 주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나는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천하고 가증스러운 죄는 ‘증오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에 가장 극명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지독히 거스르는 죄를 내 마음에 키우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요, 왕의 백성이요, 목자의 양떼인 우리는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중하고 악한 죄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용서하지 않는 영’에 의해 훼손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에 화를 냈다. 그 이유는 정당했지만 그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신 것이었다.

 

(2)너희에게 잘못(‘고의적인 과실’, ‘의도적인 위반’)한 사람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마6:12-15) Richard C.Trench(19c 영국, 신약 신학자)는 ‘잘못’이란 ‘피할 수 있든지 없든지 올바로 서 있어야 할 곳에서 넘어지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한 하나님을 표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최선의 봉사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해야 고작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눅17:10)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3)먼저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라!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 중에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마5:23,25)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용서하는 사람보다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시는 사람은 없으며, 용서하는 사람보다 마귀가 더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셋째, 마귀의 시험이 무엇인지 아는 성도의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주기도문 후반부 세 번째 간구)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힘은 너무나 강력하기에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두려워해야 한다. 마귀의 시험을 우습게 여기고,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면 안 된다. 마귀의 시험에 직면할 때, 우리는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라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악에서 완전히 건짐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는 주변 사람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있다…”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9) 당신의 수 많은 형제 자매들이 지금 당신과 똑 같은 싸움을 벌이며 고난을 당하고 있다. 성도들이 벌이는 이런 싸움과 분투에 의해 ‘하나님의 날’이 늦어지느냐 빨라지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마땅한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 기도하라

-우리가 생명의 양식을 구할 수 있는가?→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6:35)

-우리는 우리 육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기도할 수 있는가?→”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0

-우리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가?→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하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용서의 영이시다. 우리가 예수께 우리 자신과 우리 삶 전체를 드리면 예수님도 우리에게 자기 자신과 자시 삶 전체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할 때 예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며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심판 법정에서 이루어 지는 것 또한 가능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종종 부딪히는 마귀의 시험과 관련해,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신”(히4:15)분이요,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는”(히2:18)분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 눈앞에 기도 영역 전체를 활짝 펼쳐 주심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영적인 지혜를 가지고 진지하게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마땅히 드려야 할 모든 기도를 드린 것이다.

 

 

3.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은밀한 장소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공공장소에서도 기도하는 심령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의 생각 자체가 기도가 될 것이며 현장에 부재하는 친구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은밀한 장소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행위’로서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될 것이다.

 

기도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_개인기도와 공동기도 습관화 하기(마6:5-8, 마18:19-20)

 

기도는 오직 중보의 아들(그리스도)을 통하여, 영감을 주시는 성령에 의해서, 아들이 계시하신 아버지께 드려질 때에만 가능하며 타당하다. 또한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목자이신 하나님의 양떼로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에 만족하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갈 때에만 능력 있는 기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범’에 계시된 영역 안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기도와 관련된 두 가지 책임(‘개인기도의 책임’과 공동기도의 책임’)

(1)첫째, 개인기도의 책임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5-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기도하는 것을 경고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각자의 삶에 혼자 조용히 기도하기 위한 특별한 장소, 시간,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2)둘째, 공동기도의 책임

“너희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이 구절은 참된 ‘기도회’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선언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우리 삶 전반이 주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자의로 모이는’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중에 계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받들고 예수께 순종하고, 인생의 모든 사건에서 예수님의 의견을 묻는다는 의미이고 성령께서는 그러한 심령에 하나님의 뜻과 정확히 일치하는 의욕과 기도를 부어 주신다. 그리고 그럴 때 기도 응답이 보장된다.

 

우리의 기도와 관련하여 예수님이 정하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과 “우리가 성령 안에서 구하느냐” 하는 것에 관계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회는 어떤 것을 향한 우리의 욕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토대로 해야 하며 우리 가운데 두 세 사람이 주님의 다스림 이래 성령의 감동을 받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공통된 갈급함을 주실 때 우리는 무엇을 구하든지 반드시 응답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회를 낳는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의 생명력 있는 교제에 들어간 성도들이 서로 나누는 성령의 영감이다.

 

개인 기도를 습관화 하려면 (명확한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

 

(1)기도를 위해 따로 구별된 장소를 가져야 한다 (‘분리’, ‘격리’, ‘은밀함’의 필요성).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상으로부터 물러남을 위한 장소, 격리를 위한 시간,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이 고귀하고 신령한 특권을 실행하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즉, 우리 영혼에 ‘벧엘’(하나님의 집)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정해진 시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2)어디서 기도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기도하는 장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그곳에서 영적 접근을 통해 하나님과 규칙적으로 교제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충분히 강해질 수 있는데도 강해지지 못하게 될 것이며, 기도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나타내는 습관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3)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라

(4)기도의 습관을 배양하라. 당신에게 가장 유익한 기도습관(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는데 가장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기도 방법을 당신 스스로 찾아 내는 것)을 배양하라. 또한 습관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루하루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5)규칙적으로 기도하면 ‘항상’기도하게 된다. :눅18:1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을 것이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낙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 뿐 아니라 인간이 삶의 치열한 싸움에서 어깨에 가해진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낙심에 빠지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은 인간이 낙심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능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다. 특정한 장소와 시간과 방법을 준수하며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은밀한 장소에서 익힌 규칙적인 기도 습관이 또한 삶의 전반을 통해 기도할 책임을 지운다는 것을 점차 깨달을 것이다. 확고히 굳어진 규칙적인 기도 습관이 불규칙하게 흐트러진 우리의 기도 시간과 장소와 방법에 규칙성과 지속성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6)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알맞은 때에 돕는 은혜를 얻는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14:16)

 

공동기도회를 습관화 하려면

(1)기도회는 장소와 무관하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두 영혼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장소는 문제되지 않는다.

(2)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한다. 

우리를 모이게 하는 유일한 분은 지금도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을 나누는 사람, 즉 그리스도의 사랑의 자극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조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영혼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야 비로소 참된 기도회가 구성된다.

(3)당신의 집을 기도의 장소로 삼으라.

(4)성령의 강권과 억제를 받는 기도회

나는 성도들이 가정 생활이나 사회 생활을 할 때, ‘서로’ 자주 모여 기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소규모 모임에서 기도로 교제하는 습관을 배양할 때, 그것이 교회의 힘을 얼마나 강하게 할 지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능력 있는 기도의 세 가지 특징

*특징1-명확히 기도하라! : 

기도를 드릴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구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없다. 기도할 때 명확하게 구하지 않으면 ‘기도’라는 귀한 기회를 허비하게 되며 우리의 기도를 막연하게 일반화 하면 그것이 마침내 허공으로 증발해버리고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 능력도 나타내지 못하게 된다. 또한 공동기도회도 ‘명확함’의 원칙은 필요한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 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특징2- 당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인내로 구하라!→눅11장과 18장의비유.

 

*특징3-하나님의 응답에 순복 하라! :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응답이 어떤 모양, 어떤 방법으로 오든지, 언제 응답하시든지 순복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기도의 주제

_하나님의 주권과 지혜를 인정하는 기도를 드리는가?

기도는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하는 데까지 이르기 위해 따르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걷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빛을 얻기 위해 따르는 규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간구하는 기도 제목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를 인정하는 간구인지 신중하게 살피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이다.

 

우리가 반드시 구해야 할 것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 하나님 말씀을 위한 기도, 모든 영혼을 위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역 자들을 위한 기도

 

(1)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하라 : 

예수님은 그 숭고하고 심원한 중보의 기도(요17장 참조)에서, 바울은 옥중서신(에배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이 입증하는 것처럼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했다.

(2) 하나님 말씀을 위해 기도하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살후3:1)

(3)그리스도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라

(4)설교자를 위해 기도하라.

 “일 주일 동안 여러분의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기도한 만큼 기대감을 갖게 될 것이고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을 그에게서 얻게 될 것입니다”-베리 박사 설교 중에서

(5)모든 영혼을 위해 기도하라:

우리는 모든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슬퍼하고 한탄하는 영혼들, 죄에 빠져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Alfred Tennyson-

“기도는 이 세상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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